사진: 미리암은 도움이 필요하면 집에 설치된 긴급 호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IFCJ는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돕기 위해 집안에 ‘긴급 호출 버튼’ 장치를 설치해 돕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귀환한 노인들로, 거동이 불편한데다 정기적으로 이들을 돌볼 가족이 없기 때문에 긴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 호출 버튼을 이용해 필요한 도움을 받습니다.

버튼은 콜 센터로 연결되어 상황에 따라 구급차를 보내거나 병원으로 이송해주며, 의료진을 태운 차량이 방문하는 일정도 잡아줍니다.

어느덧 87세가 된 미리암은 ‘긴급 호출 버튼’ 혜택을 받고 있는 생존자 7천 명 중 한 사람입니다. 프랑스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미리암은 1940년 아버지가 나치의 포로로 잡히면서 엄마와 단 둘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셨어요. 가장 먼저 기독교 가정을 찾아 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고, 이후 우리 모녀를 숨겨줄 또다른 기독교 가정을 만났죠.”

미리암의 엄마는 신분증을 위조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겼고, 다행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중부로 건너간 모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독교 가정에서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처럼 행운이 따른 유대인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견뎠으면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인데… 1944년이 끝날 무렵, 나치들이 갑자기 이웃마을에 들이닥쳤어요. 집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불러내 한 교회에 몰아넣고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같은 날 살인마들은 우리가 숨어있던 마을까지 점령했지요. 그들은 경찰서를 찾아가 거기 있던 사람들부터 죽였어요. 그리고는 집집마다 들이닥쳐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살했죠…”

6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미리암은 당시의 상황을 마치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습니다. “엄마와 나는 살던 오두막 뒤쪽 문으로 황급히 나가 몸을 숨겼어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나치들이 창문을 부수고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나갔다고 들었어요. 그때가 죽음이 가장 가깝게 느껴졌던 순간이었어요. 다행히 곧 미군들이 도착해 프랑스도 자유를 얻게 되었죠. 수소문 끝에 아버지의 생사를 알게 됐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미리암은 엄마를 프랑스에 남겨둔 채 1949년 홀로 ‘알리야’(aliyah: 본향인 이스라엘로 이주함을 뜻함)를 단행했습니다. 혼자 오게 된 이유는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진 외할머니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죠. 네타니아(Netanya) 근처에 자리잡은 난민촌에 머물게 된 미리암은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 엘리를 만났습니다. 베쩰렐(Bezalel) 예술 및 디자인 학교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후 고고학 관련 일러스트로 오랫동안 활동하다 현재는 93세가 된 남편을 홀로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고관절을 다친 이후 엘리가 잘 못 걷게 됐는데, IFCJ가 먼저 우리를 찾아와 ‘긴급 호출 버튼’을 설치해줬어요. 자녀들이 모두 하이파(Haifa)에 살고 있어 이곳 예루살렘에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한 밤 중에 남편이 고통을 호소하더라도 이 호출 버튼 덕분에 의료진이 집으로 찾아와 치료해주었죠. 그래서 지금은 안심하고 밤에 잘 수 있게 됐어요. 병들고 나이든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갑자기 쓰러지더라도 지원군이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하고 든든하지 몰라요.”

혹자는 이들이 너무 오래 살았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 없이 자유를 빼앗기고 끔찍한 시절을 견뎌낸 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들이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연약했던 유년시절에도 기독교인들이 저를 돌봐줬는데, 이제는 삶의 끝자락에서 나를 보살펴주네요. 이 자그마한 장치가 있어서 마치 우리를 수호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항상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늘 감사드려요. 여러분 모두에게 큰 축복이 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