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중부의 아쉬도드(Ashdod)역. 매일 아침 8시가 되면 2대의 이동식 치과 진료차가 당장 치과진료를 받아야 하는 노인들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행하는 이동진료 차량에는 치과용 의료기기와 도구들이 모두 갖춰져 있으며, 치과의사 한 명과 보조 의료진 한 명이 팀을 이뤄 치료비를 내지 못하거나 병원에 가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전문적인 치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하루동안 이동식 차량에 탑승해 아쉬도드 시내를 돌며 환자들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날 차를 운전한 사람은 치과의사인 올레그(Oleg) 박사였습니다. 주로 어떤 환자를 만나냐는 질문에 그는 “하루에 10명 안팎의 어르신들을 진료하는데, 대부분 새 틀니가 필요합니다. 이가 다 빠지거나 못 쓰게 되면 기본적으로 음식을 씹을 수 없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을 겪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구 소련 연방에서 온 환자들이 대부분인데, 그 시절엔 50세가 넘으면 대부분 새 치아로 교체했어요. 하지만 20~30년이 지나면 수명이 다하기 때문에 새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먹지도, 씹지도 못할 뿐 더러 제일 속상한 일은 이를 드러내기가 부끄러워 더 이상 웃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굶주림에서 벗어나 자아실현을 이루다

올가 박사와 함께 들린 첫 번째 집에는 86세의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피오나 할머니는 매력적인 미소와 활기찬 정신의 소유자로 연세보다 훨씬 젋어 보여 볼품없는 건강상태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현관문을 들어서자 나를 본 피오나 할머니는 불안해 보였습니다. 올가 박사에게 물어보니, “주로 구 소련 연방에서 귀환한 노인들은 IFCJ가 제공하는 친절함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혹시나 자신들에게 친절을 베푼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닌지 접근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할머니가 불편해 하지 않도록 곧바로 나는 IFCJ가 하는 활동들을 견학하러 온 사람일 뿐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1929년 우크라이나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피오나 할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고 합니다. 나치들이 점점 안까지 쳐들어오면서 피오나 엄마는 자신과 남동생을 데리고 시베리아로 피신했습니다. “나이는 꾀 어렸지만 튼튼해 보였는지 강제로 일을 하게 됐는데, 할당량에 따라 식량을 나눠주다 보니 가족이 늘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였어요. 각종 질병이 창궐했고 약도 매우 부족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었죠.”

전시 후 피오나 가족은 수도인 키예프로 이주해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행복도 잠시, 당시의 기억 대부분은 슬픈 현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회상합니다. “장기간 동안 기근이 이어졌고,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2차 세계대전 후 그나마 남아있던 유대인 삶마저 잃어버렸어요.”

삶은 힘겨웠지만 피오나 할머니 부부는 어떻게든 두 딸들과 함께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면서, 언젠가는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대인을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았어요. 어디를 가나 유대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죠. 그래서 우리는 힘을 내어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지난 1998년 이스라엘로 이주했습니다.”

이제 86세가 된 피오나 할머니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고 7명의 손자를 둔 딸 내외와 살고 있습니다. 몸이 약한 상태에 비해 안정적인 편이지만, 20년 넘게 오래된 의치로 생활하다 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지 오래고, 통증 없이는 음식을 씹는 게 어렵다고 말합니다. “음식을 섞어 먹거나 곱게 간 후 먹어야 해서 필수 단백질인 닭이나 생선을 못 먹어봤어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 맞춰 올레그 박사는 제작한 새 틀니를 맞춰봅니다. 의사에게 길을 비켜주던 나는 피오나 할머니로부터 따뜻한 인사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IFCJ가 제공한 이 선물이 제 생의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더 값지게 그리고 즐겁게 해줄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온가족과 함께 만찬을 즐기다

다음으로 방문한 가정도 딸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였습니다. 피라(Fira) 할머니의 딸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새 틀니로 교환 예정인 피라는 옆방에서 준비 중이라고 귀뜸하면서, “어머니는 지금 매우 들떠 계세요.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씹거나 넘기지 못해 그동안 살이 많이 빠져서 가족들이 늘 걱정했다”고 말했습니다.

피라 할머니도 우크라이나의 대도시인 Vilniansk에서 태어났습니다. 피오나 할머니와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을 시베리아에서 보냈는데, 전후 기간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합니다. 적군에 있는 동안 아버지와 남동생이 사망하면서 가족들은 갈 곳을 잃었습니다. 전쟁 후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한 피라 할머니는 그곳에서 다른 유대인 여성처럼 이른 나이에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곳저곳을 떠돌다 보니 정착하기 어려웠고, 당시 이스라엘의 농업 공동체로 유명했던 키부츠(kibbutz)에서 생활하는 것을 꿈꿨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기에 그 꿈은 이뤄졌으나 키부츠가 아닌 이스라엘 서부의 작은 도시 아쉬도드로 이주했습니다.

피라 할머니의 남편은 15년 전 세상을 떠났고 이후 현재까지 딸내외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살림으로 생활하며, 서로를 위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함께 나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라 할머니에게 새 틀니를 갖는 것은 이들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비용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IFCJ 덕분에 이제 피라 할머니는 온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고통없이 식사를 즐기며 늘 움츠려 들었던 어깨도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레그 박사는 이날 늦은 시간까지 여러 집을 방문하며 노인들에게 필요한 치과 진료를 했습니다. 방문하는 곳마다 앞서 소개한 노인들의 간증이 이어졌고, IFCJ가 노인과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지원활동들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올레그 박사는 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다시 한 번 IFCJ가 베푸는 자비와 친절함에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매일 환자들을 방문할 때면 어김없이 여러분의 지원에 감격해 하며 축복을 내려줍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저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다고 믿습니다. 제게는 IFCJ 팀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게 큰 행운입니다”라며 환하게 웃어보였습니다.